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이광수(1965)|이광수]] 생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Wfpc4OGXlM)][youtube(7g_sOuULYcg)]}}}|| || ▲ 9월 19일, '''MBC 뉴스데스크'''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18명 자살 1명 생포》[* 당시 방송심의규정이 느슨했던 관계로 시신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지 않다. [[https://news.kbs.co.kr/mobile/vod/program.do?bcd=0001#19960919|KBS 역시]] 마찬가지였다.] || 9월 18일 16시 30분 경, 거동수상자를 발견했다는 농부 홍성은씨 부부의 신고로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M1 카빈]]으로 무장하고 출동한다. 파출소에서 고작 2km 떨어진 거리였다고 한다.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신고자의 남편인 농장 주인과 대화 중이던 이광수에게 접근하여 M1 카빈을 조준하고 '꼼짝 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라고 말하자 이광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최우영 경장이 달려들어 이광수의 손을 내리쳐 이광수가 권총을 떨어트리면서 일촉즉발의 순간에 이광수는 제압되었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포자가 되었다.[* 그 당시 이광수는 두 사람을 경찰이 아닌 헌병으로 알았다고 한다.] 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순간으로 이광수가 이 때 체포되어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신원과 수를 전부 진술했기에 군 당국은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이광수의 진술 전까지만 해도 군 당국은 침투 인원의 수를 10여명 남짓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광수의 진술이 없었다면 군 당국은 다른 무장공비들은 어떻게 잡았더라도, 한 달 반 동안이나 포위망 밖에서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녔던 정찰조원들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 못하여 작전에 어려움이 더 컸었을 수도 있다.[* 이광수의 증언도 26명인지 25명인지를 헷갈려 하고 이름을 혼동하기도 하는 등 100%까지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진술이 작전 계획 수립 등에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하다.] 물론 이들은 도주 과정에서 민가에 침입해 식량, 의복 등을 훔쳤고 사람들을 맞닥뜨리면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살해하고 다녔기 때문에 결국 존재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사건 초기에 침투 인원과 목적 등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정보가 전혀 없는 것에 비해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이광수와 최우영은 서로가 서로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689180|기사]] 이게 사실인 것이 만일 '''이광수가 권총을 꺼내는 것을 최우영이 막지 못했다면''' 전호구에 의해 '''이광수가 사살되거나''', 최악의 경우 '''이광수가 최우영, 전호구 경장을 모두 사살하고 신고자인 민간인까지 살해한 후 M1 카빈 소총을 탈취하여 달아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적의 규모를 알 수 없어 작전에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이광수 또한 다른 무장공비들처럼 다른 곳에서 군에게 사살되거나 운 좋게 생포되었더라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남한 사회에 이렇게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고 과정에서 농부 부부의 재치와 용기가 대단했는데, 남편이 이광수에게 다가가서 "송이버섯 따러 오셨냐?"며 동네 주민인 줄 아는 척 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여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인이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2인이 있는 경우라면 1인이 거수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1인이 경찰에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정석이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굉장히 위험하므로 함부로 시도하지는 말자.] 이광수는 부인이 신고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외딴 농장에 전화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하고 경찰이 오더라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한 집집 마다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 집에서 절대로 시간을 끌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1990년대 말까지도 '''전화가 없는 경우'''에 가능한 여러가지 대공신고방안들을 소개하는 교육자료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전화가 직접 들어오지 않는 곳이 어지간한 무인도급 벽지에서조차 사라진 것은 00년대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간첩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 당시의 북한에서는 가정용 전화기가 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기는 각 마을별로 마을별로 몇대씩 두고 공동으로 쓰는 일이 대부분이였다. 전화가 각 가정에서 쉽게 할수있게된것은 휴대폰이 보급된 2010년대의 일이다.] 이미 [[새마을 운동]] 때 촌구석 곳곳까지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설령 집에는 직접 전화선이 들어오지 않는 벽지라도 근처에 전화 되는 곳 하나 쯤은 있었다. 거기다 이광수가 생포된 장소는 강릉 시가지에서 직선거리로 5~6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고 근처에 [[동해고속도로]](현 [[7번 국도]])가 지나가는 등 1990년대에 전화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오지도 아니었다. 생포된 이광수는 생포 직후에는 침투 인원이 총 20명이라거나 민방위 훈련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는 등 대놓고 엉터리 진술을 해서 일부러 역정보를 흘려 작전 수립에 혼란을 빚으려고 의도적으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나중에 밝히길 동료들을 위해 하루만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주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 군 당국에 제대로 협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1일부터는 다른 무장공비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남파 공작원으로 보내졌다가 대한민국에 귀순한 [[김신조]], [[김현희]] 등의 근황을 담은 전단지도 공비 [[잔당]]들이 숨어든 산에 살포했다.] 응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이광수는 조사 중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광어회는 고급 음식으로, 이광수 자신은 잠수기지에서 직접 여름철 해상훈련 도중 산소통, 작살등으로 광어를 잡았기에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하지만 '못 사는' 남한에 광어회나 있겠느냐는 심정에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광수의 생각과 다르게 당시 남한에서 광어회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양식이 80년대부터 시작돼 90년대 들어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조사관들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고급 음식이라 쉽게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광어회를 바로 가져다 주자 이광수는 그제서야 조사에 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345830#home|#]]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에, 또는 남한 내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로 된 탈출 명령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입방아를 찧었으나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단순 루머였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339302#home|#]] 이광수는 96년 10월 기자회견에서 '북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남조선에 침투한 죄인으로서 처분대로 하겠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전향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했다. 이후 그는 남한에 남았고 사회에 잘 적응하며 해군 군무원 신분의 정훈 교관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다 한번은 이 사건의 전사자 중 한 명인 오영안 대령의 아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악수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오 대령이 전사한 것은 이광수가 이미 생포된 뒤의 일인데다 해당 공비는 사살됐다. 즉 이광수가 한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유족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원수의 동료'가 건네는 악수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던 듯하다.] 2011년 이광수는 안보교육과 전술토론에 참가해 당시 지형지물을 거론하며 침투를 증언했다. 이씨는 북에서 훈련을 받은 곳과 이곳의 차이는 도로에 차가 많이 다니고 불이 환한 것만 빼고는 똑같았다”며 “군 초소가 있지만, 근무를 서지 않는 것까지 알았다. 잠수함 내부를 불태우고 11명만 자살한 것은 탑승 승조원이 11명뿐인 것으로 위장하려던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